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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연습] 아리스토텔레스 - 1
전경화(secret246) | 2012-12-10 | 45141 HIT
아리스토텔레스 (BC384∼BC322)
 
[ 생 애 ]
그리스의 철학자로 에게해 북단 칼키디케 반도의 스타기라에서 출생.
마케도니아왕 주치의인 니코마코스의 아들.
17세 때 아테네로 나와 플라톤의 제자가 되었어 20여년동안 그의 문하에 있었음.
플라톤이 죽은 후. 친구 헤르미아스를 찾아가 식물학과 동물학을 연구하고 교수생활을 함. 헤르미아스의 조카인 퓨티아스와 결혼을 함.
헤르미아스가 죽은 후.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의 요청으로 7년간 알렉산더 왕자의 교육을 맡음.
기원전 335년.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에 자신의 학원을 열고 12년간 후학 양성에 힘씀.
이때 오전에는 고급반 오후에는 일반학생을 대상으로 웅변이나 수사학 같은 일반적인 강의를 진행하였는데 이때 산책을 하며 수업을 진행해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를 소요학파라고 부르기도 했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아테네에 반(反)마케도니아운동이 일어나 한때 알렉산더의 스승이었다는 사실로 불경죄에 기소되고 이것을 계기로 미련없이 아테네를 떠남. (이때 무고한 죄목으로 죽음을 맞이한 소크라테스를 상기하며 “다시는 철학을 더럽히지 못하게 하기위해 아테네를 떠난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
이듬해 322년. 어머니고향인 에우보이아섬에 칼키스에서 제자인 안티파테르를 후계자로 삼고 병사로 죽음.
이때 아내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남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가 배출한 최고의 수재자였고, 플라톤의 제자이자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 모든 학문에 능통했던 백과사전적인 인물, 리케리온이라는 학교를 열어 젊인이들의 교육에 앞장섰으며 거의 모든 학문의 기초를 닦은 학자 등은 그를 설명하는 표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학, 물리학, 천문학, 생물학, 생리학, 해부학, 식물학, 박물학, 심리학, 정치학, 논리학, 시학, 수사학, 미학, 신학, 형이상학 등에 정통했다고 한다.
 
[ 저 술 ]
논리학 : 《범주들》 《명제에 관하여》 《분석론 전서》 《분석론 후서》 《변증론》 《소피스트적 논박》
자연학 : 《[[자연학 (아리스토텔레스)|자연학]]》 《천체에 관하여》 《생성과 소멸에 관하여》 《기상학》 《영혼에 관하여》 《자연학 논문집》 《감각과 감각 대상에 관하여》 《기억과 생각해냄에 관하여》 《잠과 깨어있음에 관하여》 《꿈에 관하여》 《잠 속의 예언에 관하여》 《장수와 단명에 관하여》 《젊음과 늙음, 삶과 죽음에 관하여》 《호흡작용에 관하여》 《동물 탐구》 《동물의 부분들에 관하여》 《동물의 움직임에 관하여》 《동물의 앞으로 움직임에 관하여》 《동물의 발성에 관하여》
형이상학 : 《[[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형이상학]]》
윤리학, 정치학 : 《[[니코마코스 윤리학]]》 《대 윤리학》 《에우데모스 윤리학》 《[[정치학 (아리스토텔레스)|정치학]]》 《아테네인들의 정치체제》
수사학, 시학 ; 《수사학》 《[[시학 (아리스토텔레스)|시학]]》
 
[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권, 제10권 에우다이모니아 = 행복 = 인생의 목적 ]
아리스토에게 좋은 삶, 인간에게 있어 가장 바람직한 삶이란 ‘에우다이모니아’ 라고 말한다.
어원적으로 에우는 잘을 의미하며 다이몬은 영적이고 신적인존재를 뜻한다 어원에 따르면 신적인 것이 잘 맞춰주고 있는 상태이다 우리말로 ‘행복’ 혹은 ‘번창하기’로 번역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은 우연히 주어지는 순간의 행복이 아니라 삶이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과정 그자체로 행복이라고 믿는 까닭에 행복하다는 말은 잘산다는 뜻으로.. 잘산다는 것은 자기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함으로 보아 분명히 현실적인 삶속에서 실현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를들어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하는거 운전사는 차를잘모는거.. 또한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고유한 기능과 소질로서 이성의 능력을 완전하게 발휘하고 실현하는데 있다고 정의했다. 먹고마시는 영양섭취기능은 동식물에게도 볼수있기에.
행복한 삶이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인 가능성과 자기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을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이 아닌 것에 행복이라고 여기고 있기에 그 생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라도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가를 새로 물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 사회통념적인 행복 -
* 쾌락 : 이성적존재로서의 인간에게는 궁극적목적이 될수 없다 (노예나 짐승의목적은될 수 있다)
* 명예 : 가변적이고 우연적인 것을 인생의 목표로 볼 수는 없다.
* 탁월성 : 탁월성이란 잠재력으로서 전혀 발휘됨이 없이 잠잘 수도 있으며 많이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참한 생애를 보내기도하기에 그자체로 행복이 될 순 없다.
* 경제적인 부 : 재물은 그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다른 것을 위한 수단이기 때문
* 좋은것의 이데아 : 이데아가 있다해도 이지상에서의 실천생활에 있어 아무소용없기에 플라톤의 견해의 반대입장.
 
- 그 시대 사람들의 행복한 삶 -
* 쾌락적인 삶 : 일반대중들은 동물적본성에따른 쾌락적삶을 선택하지만 짐승에게도 알맞은 것으로 인간고유의 삶은 아니다.
* 정치적인 삶 : 교양있는 사람들과 실천적인 사람들이 명예를 좋음으로 생각하기에 행복한삶이 될수는 있지만 명예는 위에서 말한것과 같이 받는사람보다 주는사람에게 달려있어 가변적이기에 볼 수 없다.
* 관조적인 삶 : 자족적이며, 참된 행복에 이르게하는 삶.
⓵ 이것이 최고의 활동이며 이성적으로 이성적 대상을 사유하는 것이기에 최선의 활동이 된다.
⓶ 영속적인 활동이다.
⓷ 즐거움이 섞여 있다.
⓸ 자족도 관조적 활동과 관여한다. 철학자는 자기혼자 있을때에도 진리를 관조할수 있기때문
⓹ 관조는 그자체가 목적이다.
⓺ 관조하는 생활은 여가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⓻ 인간적 차원보다 높은 것, 즉 신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활동 가운데서는 신의 활동을 가장 많이 닮은 것이 가장 행복한 것이다.
당시 학자들이 무보수 생활이 존경받았고 대부분 상류층 사람들은 공적인 문제에 헌신했다. 사람들에게 거리를 두고 사는 학자와 사회에 적극 참여하는 정치인을 비교하는 것은 지식인들이 즐기는 테마였다. 그리고 이것이 항상 조화속에 있었다면 문제되지 않겠지만 상충되는경우가 있기에 그시대사람들은 위의 세가지 삶이 충분히 공감될만한 행복한 삶의 후보일 것이다.
 
[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5권 ]
* 제 1장 넓은의미의 정의
이 행복관은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5권에 나오는 정의론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아리스토의 행복이란 모든 개인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것이고 공동체적인 실천을 통해 얻어지는데 이것이 곧 덕이다. 그는 정의를 공동체의 고유한 덕이라고 규정하면서 덕이 없는 상태는 정의가 부정의한 상태라 말한다. 정의로운 것은 법에 따르는 것. 즉 하나의 단일한 방식에 따라 정치적 공동체를 위해 행복과 행복의 부분들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을 보전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의를 간단히 말하면 개인의선을 공동의 선으로 전환시킬수 있는 삶의 원칙.
( 정의로운사람 : 법을지키는사람, 공정한사람 VS 부정의한사람 : 법을어기는사람, 공정하지않는사람, 더많이가지려는사람 )
 
* 제 3장 분배적 정의 정의란 각자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으로 보기에 그 대상과 그것이 할당될 사람이 필요하다. 그것은 또한 평등한사람에게 평등한 대상들이 할당되어야 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동등함과 사물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동등함은 동일하고 봤기에 정의로운 것은 일종의 비례적인 것으로 보았다.(ex) 당사자들이 동듬함에도 동등하지 않은 몫을,. 혹은 동등하지 않은 사람들이 동등한 몫을 분배받아 갖게 되면 싸움과 불평이 생긴다.)
 
분배적 정의 – 평등한 시민들의 지배관계에 의해 분출되는 불평등을 극복할수 있는 방법으로 정치적 정의이지만, 누가 정당한 몫을 받을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결정은 각자 처한 환경에 따라 다른 가치를 설정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의미로는 능력,업적,공익에 대한 기여도에 따라 지배관계로부터 발생하는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사회원칙으로 본다. 그렇기에 분배적 정의는 평등한 구성원들의 개인적 차이가 있어도 서로 합의할수 있는 공동가치에 토대를 둘수 있다.
보상적 정의 - 많이 가진자의 일부를 적게 가진자에게 되돌려줌으로 평형 상태복원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은 도덕적 행위의 주체인 인격을 배제하는 원칙이기에 공동체질서를 파괴할수 있다고 보고 공동체적 선의 교환에서만 국한 할 것을 제안한다.
 
정의의 원칙 : ‘정의로운 일을 행하는 것’은 부정의한 일을 행하는 것과 부정의한 일을 당하는 것의 중간이다. 부정의를 행하는 것은 너무 많이 가지는 것이며, 부정의를 당하는 것은 너무 적게 가지는 것이니까. 정의는 일종의 중용이지만, 다른 탁월성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중용인 것은 아니고, 중간에 직접 관계하기 때문에 중용이다. 반면 부정의는 극단에 관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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